런던 길

런던에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찾아가 보고 싶은 길, 자연스레 걷게 되는 길, 무심코 지나치는 길이 그것인데요.

예컨대 비틀즈의 앨범 자켓 사진으로 단숨에 명소가 되어버린 아비 로드(Abbey Road)와 셜록 홈즈의 주거지 베이커 스트릿(Baker Street)은 열성적인 팬이 아니라도 런던에 왔다면 한번쯤 찾아가 보고 싶은 길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심을 관통하는 옥스포드 스트릿(Oxford Street)과 피카딜리(Piccadilly)는 런던에서 보내는 하루 중 한번은 자연스레 걷게 되는 길이죠. 이 두 길은 오늘도 회사원과 학생, 관광객들, 그리고 꿈을 좇는 젊은이들로 북적입니다. 그렇다면 런던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길은 어디이고,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먼저 무심코 지나치는 길은 우리가 어느 목적지까지 도달하기까지의 경로로 간주하고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길을 말합니다.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그야말로 깨알같이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런던에 도착한 첫날 최대한 ‘생산적인’ 동선을 짜기 위해 이길 저길을 어림잡고 궁리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의 관심은 그날 보기로 정한 명소들을 단시간에 연결하는 최단 경로 찾기에 집중됩니다. 데이 캡(런던 시내에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중 일정 금액이 초과하면 더이상 요금이 붙지 않는, 일종의 정액제)의 혜택을 믿고 버스와 튜브를 갈아 타며, 우리는 길 위에서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시간을 아까워 합니다. 그러나, 아비 로드에는 정말 아비 로드밖에 없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물론 팬들에게는 비틀즈가 건넌 횡단보도에서 찍는 사진 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곳에 이르기까지 무심결에 지나치는 길들에 숨은 이야기들의 합이 뜻밖에도 아비 로드에 담긴 사연보다 많을 수도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길의 지극히 평범한 집 담벼락에 동그라미 모양의 표식이 붙어 있다면, 걸음을 멈추고 잠시 거기에 새겨진 이름과 짧은 이야기를 감상하세요.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 사이로 유독 고풍스런 디자인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면, 또 한번 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 장면을 기억하세요. 그 길의 그 날 그 느낌은 나 혼자만 알 수 있는 나만의 런던 지도가 됩니다.

런던의 여러 길들을 비틀즈 뿐 아니라 여러 음악가들이 거쳐갔습니다.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잠시 거주했던 브룩 스트릿(Brook street). 메이페어(Mayfair)에 있습니다. 출처: BBC 뉴스 사진2) 신구의 조화가 어우러지는 런던의 대표적인 길, 소호의 그레이트 말보로 스트릿(Great Marlborough Street)에 위치한 리버티 백화점. 출처: www.Victorianweb.org

런던의 여러 길들을 비틀즈 뿐 아니라 여러 음악가들이 거쳐갔습니다.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잠시 거주했던 브룩 스트릿(Brook street). 메이페어(Mayfair)에 있습니다. 출처: BBC 뉴스

신구의 조화가 어우러지는 런던의 대표적인 길, 소호의 그레이트 말보로 스트릿(Great Marlborough Street)에 위치한 리버티 백화점. 출처: www.Victorianweb.org

신구의 조화가 어우러지는 런던의 대표적인 길, 소호의 그레이트 말보로 스트릿(Great Marlborough Street)에 위치한 리버티 백화점. 출처: www.Victorianweb.org

무심코 지나치는 길은 또한 도심을 헤매이다 얼떨결에 잘못 들어버린, 런던의 작은 골목길이기도 합니다. 영어로 앨리(alley)라고 부르는 이 작은 길들은 일정이 빠듯한 관광객들에게 당혹감을 안기곤 하죠. 휴대전화의 GPS가 신호를 잃어 엉뚱한 길로 안내해 인적이 드문 뒷골목에 들어서게 되면, 미로같은 통로에 갇혀 혹시 길을 잃게 될까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왔던 길을 돌아 큰길로 나와서 다시 지도 보기를 반복하며 인파에 기꺼이 몸을 섞습니다. 그러나 쇼핑객의 홍수를 이루는 날씨 좋은 주말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빅 세일 기간에는 큰 길도 딱히 길찾기의 답을 주지 않습니다. 강남대로보다 몇배로 붐비는 옥스포드 스트릿에서 발이 반쯤 허공에 뜬 채 내 의지대로 어딘가를 향해 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유쾌한 일도 아닙니다. 구글 맵은 이제 더이상 낯선 이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우리에게 선물했지만, 안그래도 사람이 많은 큰길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리는 기현상을 낳았습니다. 애플리케이션은 일반적인 경로만을 안내하니까요.

크리스마스 시즌의 옥스포드 스트릿. 일간지 텔라그라프(Telegraph)는 이를 런던 시내의 ‘일반적인 광경(general view)’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출처: Telegraph

크리스마스 시즌의 옥스포드 스트릿. 일간지 텔라그라프(Telegraph)는 이를 런던 시내의 ‘일반적인 광경(general view)’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출처: Telegraph

그러나 몇 블록만 지나쳤을 뿐인데도 전세계를 한바퀴 돈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언어와 인종이 오가는 런던의 큰길을 걷다 보면, 사람의 말과 발소리들로부터 멀어져 잠깐의 고요를 찾고 싶은 순간이 분명히 옵니다. 요즘처럼 슬슬 열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 시원한 골목길 그늘에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기도 하고요. 잘못 들어선 앨리에 그 답이 있습니다. 몇몇 앨리들은 뜻밖에도 으스스하고, 적막하며, 미로같습니다. 이왕 좌표를 잃어버린 김에, 한 블록 비껴난 그 앨리를 그대로 미끄러지듯 걸어보는건 어떨까요. 당초 계획에서 조금 벗어나도, 촉각을 다투는 출퇴근 길만 아니라면, 조금은 두렵고 그래서 두근두근한 그 방황은 길어도 10분을 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곳곳에 튜브 스테이션과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까요. 큰 길가에 울려퍼지는 경적소리와 상점의 노랫소리가 스타카토와 같다면, 앨리가 주는 한 템포 느린 박자도 엄연히 런던의 길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일부입니다.

날씨에 따라서 조금은 괴기스럽게도 보이는 앨리. 비오는 날이면 대부분 이런 풍경이죠. 출처: by Tim Arai, Flicker

날씨에 따라서 조금은 괴기스럽게도 보이는 앨리. 비오는 날이면 대부분 이런 풍경이죠. 출처: by Tim Arai, Flicker

우리가 크게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는 앨리들이 주는 이런 색다른 느낌은 영국의 일부 예술가들에게 ’진짜 런던’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작품들이 소위 말하는 그 ‘뒷골목’을 무대로 하여 탄생했습니다. 아써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 셜록(Sherlock)에서 셜록이 범인을 쫓을 때 그를 앞지르기 위해 쓰는 비법은 소호의 샛길입니다. 전혀 길이 더 있을 것 같지 않은 막다른 골목과 가정집 사이를 검은 코트 차림으로 사뿐히 그리고 거리낌 없이 누비죠. 아마도 은밀한 수사를 해야하는 셜록에게는 런던의 앨리들이 탐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최적화 된, 지극히 사적이고 ‘셜록 스러운’ 길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작품들에서 런던의 뒷골목은 소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후미진 시장길에 모여 삽니다. 무대는 주로 런던 브릿지에서 세인트 폴 성당에 이르는, 오늘날 시티 오브 런던으로 분류되는 지역인데요. 예컨대 “리틀 도릿(Little Dorrit)”의 주인공 도릿은 보로 마켓(Borough Market) 근처의 마셜씨 감옥에서 태어나 자란 소녀입니다. 실제로 디킨스가 살았던 시절의 보로 지역은 가난한 노동자들과 죄수들이 하루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지금도 보로에 가면 푸드 트럭들이 즐비한 마켓 뒷편에서 그 역사의 흔적을 느낄수 있습니다. 이 소설 역시도 2007년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수상한 택시를 따라잡기 위해 머릿속의 샛길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키는 셜록. 출처: www.smithsonianmag.com

수상한 택시를 따라잡기 위해 머릿속의 샛길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키는 셜록. 출처: www.smithsonianmag.com

 “리틀도릿”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동명의 카페. 보로 마켓 옆 철도역 길에 위치해 있습니다. 출처: pencefn.wordpress.com

“리틀도릿”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동명의 카페. 보로 마켓 옆 철도역 길에 위치해 있습니다. 출처: pencefn.wordpress.com

이렇듯 런던 곳곳에 흩어진 뜻밖의 길들은 오늘도 우리가 찾아주고 탐험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숨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라고 자신의 이름을 통해 손짓합니다. 무심코 지나쳐 걸었던 그 길들의 부름에 응답하고 싶다면, 이번 주말 세인트 폴 성당 근처의 칩사이드(Cheapside) 길에 들러보세요. 지금은 말끔하게 다듬어져 별다른 개성 없는 새길 같아 보이지만, 이 칩사이드의 역사는 철도가 들어오기도 훨씬 전, 그러니까 자그만치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의 재래시장처럼, 칩사이드도 템즈 강을 통해 들어온 물건들을 사고파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이라는 어원에서 ‘값이 싸다’는 뜻으로 변한 영어표현 “칩(cheap)”이 들어간 이름 부터 이 길의 전체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죠. 다양한 지역의 농부들이 다양한 수확물을 소와 말에 가득 싣고 드나들다보니, 이 일대에 교통혼잡이 빚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품목 별로 줄을 지어 다니기 시작했고, 작은 길들이 그대로 골목 이름으로 굳어졌고요.

칩사이드의 과거와 현재를 합성한 사진

칩사이드의 과거와 현재를 합성한 사진

오늘날의 칩사이드. 출처: Wikipedia

오늘날의 칩사이드. 출처: Wikipedia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습니다. 칩사이드에 들어서면, 예상을 벗어나는 골목 골목의 이름들이 당신을 반길 것입니다. 몇개만 나열해 볼까요. “브레드 스트릿(Bread street),” “우드 스트릿(Wood Street),” “밀크 스트릿(Milk Street),” “허니 레인(Honey Lane),” “포울트리 앤 프라이데이 스트릿(Poultry and Friday Street)”… 각각의 길들이 무엇을 사고 팔았는지 감이 오시죠. 이 마지막 길이 특히 재밌다고 생각되는데요. 금요일마다 피쉬앤 칩스를 먹는 영국의 전통, “피쉬 프라이데이”의 유래까지도 저 길의 이름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저 옛날엔 빵을 팔았을 브레드 스트릿. 출처: jtchatter.blogspot.com

저 옛날엔 빵을 팔았을 브레드 스트릿. 출처: jtchatter.blogspot.com

칩사이드 뿐 아니라 런던의 많은 길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정비되고, 복원되고, 필요에 따라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며 변화를 거듭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그 길들을 바쁘게 지나쳐 갑니다. 행복의 의미가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있듯, 길의 매력도 숨은 이야기를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비틀즈와 셜록 홈즈처럼 너무나 유명해져 전설이 되어버린 길이나, 대번에 알아볼 수 있는 번화가를 걷는 일보다는 수고롭지만, 그만큼 비밀스럽고 가치롭습니다. 각각의 길은 오랜 시간의 더께와 함께 깊어진 하나의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걸으며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름을 보며 상상하고, 그렇게 시간을 탐험해 보세요. 경로에서 벗어나 뜻밖의 시공간을 향해 내딛는 순간, 당신의 그 발걸음이 당신만의 런던 지도에 깊이를 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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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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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02/01/2016
최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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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이야기
18/12/2015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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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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