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이상’,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라는 말은 전편에서 언급했던 국적처럼 살아가는 내내 쫓아다닌다. 홈그라운드가 아닌 곳에 산다는 이유로 수많은 장벽에 부딪히고, 그러다 결코 넘지 못할 것 같은 장벽 때문에 결국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일본에서 알게 된 한 선배는 보도부 디렉터가 꿈이었다. 외국인이라는 큰 벽을 넘고 그 선배가 제작회사에 취직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느꼈고, 무모해질 용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입사 후 5년 동안 내가 바라본 그 선배는 보도부의 근처도 가지 못한 채 사내 인사팀, 영업팀, 홍보팀 등 꿈과는 거리가 먼 곳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며 ‘현실’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능력도, 열정도, 노력도 그 무엇 하나 뜨겁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어쩌면 나에겐 절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악에 받쳐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절망했다.

마블 유니버스 (마블 세계관)에서는 다양한 영웅이 등장하는 만큼 많은 악역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영화 ‘토르’에 등장하는 ‘로키’는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캐릭터이다. 물론 로키를 연기했던 톰 미들스턴의 인기도 한몫했지만, 캐릭터 그 자체도 모성애를 불러일으킬 만큼 매력적이다. 로키는 입양아로, 어린 시절 토르와 함께 자랐다. 로키의 친아버지가 양아버지의 양숙이라는 배경을 배제하고 이야기를 풀자면, 그는 토르만큼 능력이 뛰어나고 자신이 평생 살아온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이 강해질수록, 로키는 토르가 물려받게 될 왕좌에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아버지는 로키에게 왕좌를 차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이라 느낀다. 야망이 있고, 그만큼의 능력 또한 가지고 있는 로키는 왕좌가 코앞에 있으면서도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러면서 로키는 어긋나기 시작하고, ‘악역’이라는 적대되는 캐릭터로 나타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사실 로키가 이렇게 폭주하게 된 이유는 본인 스스로가 엄청난 착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되고 싶은’ 목표가 생기면 그 자리에 오르기 바빠 ‘무엇을 하고 싶었었는가’에 대해 잊어버리곤 한다. 극 중 로키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로키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강해질수록 오르고 싶은 자리는 바로 왕좌였고, 결국 그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왕좌에 올라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왕좌에 올라야 만이 만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로키는 왜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것일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확신할 수 있는 대답은 간단하다. 그가 왕좌라는 ‘자리’에 너무나도 집착한 나머지, 자아에 대한 피해 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민족’ 출신의 입양아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족쇄처럼 느껴졌었을지 모른다. 로키가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자신은 ‘아스가르드인이 아니니까’라고 줄곧 외치는 씬에서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존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스스로가 이곳의 뿌리를 이어받지 못했다는 자격지심, 소외될 것만 같은 불안감, 신뢰받지 못할 것 만 같은 두려움 등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불안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 로키는 더욱 ‘자리’에 집착하고 ‘소속’에 얽매이게 된다. 로키가 만약 왕좌의 자리를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면 자신의 지옥 같은 마음속에서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리라 장담한다.

영화 ‘토르’ 2편에서 토르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 왕좌를 포기한다. 이 씬에서 로키는 드디어 왕좌를 차지했다며 기뻐하지만 참으로 우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로키가 왕좌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할지라도, 가족과 친구를 잃으면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르와의 진흙탕 싸움을 벌이지 않았어도 됐었다. 결과적으로 왕좌는 로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키 자신은 ‘외부인’이라는 틀에 얽매여 괴로워했지만 토르와 로키의 마지막 대화 신에서 알 수 있었듯이 토르에게 로키는 그저 ‘형제’였고, 결코 외부인이 아니었다.
아웃사이더로서 살다 보면 포기해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것이 ‘하고 싶은 무언가’ 가 아니라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자리’라고 말하고 싶다. 외국인으로서의 ‘자리’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난 잘 해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명패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그 자리를 결코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 순간 찾아오는 절망감은 말로 이룰 수 없다. 잘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서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앞에서 말한 ‘어쩌면 나에겐 절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절망했던 선배는 기다리는 것을 접어두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보도 관련 사업을 시작했고, 일본 방송에도 소개될 만큼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나라를 돌보고 지키고 싶었던 마음을 잊은 채, 욕심에 사로잡혔던 로키의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닐까하고 고민되는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될 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때로는 과감히 포기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