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를 하긴 누가 무시를 해? 내가 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어? 바쁘다 보니까 경황이 없어서 못 받은 거지.”
비상계단으로 들어가는 문 넘어 들려오는 다툼 소리에 하시는 지금 이 문을 열고 촬영 준비가 되었다고 얘기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귀를 문에 조금 더 가까이 대자 깊은 한숨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내가 애도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엄마한테 다 말해야 돼? 그냥 날 좀 믿어주면 안 되는 거냐고.”
하시는 피식하고 웃으며 문에서 귀를 서서히 떼었다. 그리고 이 문을 당장 열어 자신이 엄마와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지 모른 채 혼란뿐인 통화의 덫에 빠진 그녀를 구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양, 지금 인터뷰 시작할게요.”
퉁명스러운 말투로 전화를 서둘러 끊은 메이는 멋쩍음과 후회가 담긴 꽤나 어두운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앉았다. 하시가 카메라를 등지고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모습을 확인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하시는 한번 더 그 한숨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메이의 두 번째 한숨 소리를 들은 하시는 컴퓨터 화면에서 고개를 서서히 떼며, 일 년 전 자신이 내쉬었던 한숨 소리와 아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며, 그날을 회상했다.
– 일 년 전 –
벤치 맞은편 식당에서 풍기는 치킨 냄새에 하시는 가방에서 사과 한 개를 꺼내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어떻게 여섯 시간이나 길거리를 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건질게 한 장도 없는 것인지 한탄했다. 그때 하시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엄마’라는 이름을 확인 한 후,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넌 왜 이 머나먼 영국까지 와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거냐 이 불효자야’
하시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KFC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있을까 라는 깜깜하기만 한 걱정을 하는 동시에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 맘에 걸리기 시작했다.
아니, 받지 못한 것이 맘에 걸리기 시작했다.
계속 진동이 울리는 전화를 주머니에 품은 채 하시는 다 먹은 사과를 버린 후 벤치에서 일어나 카메라 렌즈를 다시 거리에 갖다 대었다. 걷다보니 보인 빨간색 전화부스, 마치 궁전같은 새하얀 집들이 저 멀리까지 길게 늘어진 길에 사로잡혔다.

‘예쁘다’
분위기에 취해 무작위로 셔터를 누르던 중 하시의 파인더에 길 건너편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유독 눈에 띄는 빨간 가방을 멘 그 여학생은 세상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걱정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얼굴이네. 하아. 그래, 딱 봐도 돈 걱정, 사람 걱정, 앞날 걱정이라곤 한 번도 안 해보게 생겼다 너’
예쁘장한 저 여학생이 내 여자친구고, 저 또한 근심하나 없는 얼굴로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는 헛된 상상을 잠시나마 하며 하시는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이 그녀를 쫓아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어?’
하시는 파인더에서 눈을 급히 떼고 카메라 스크린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뭐야 이 사진’
스크린 속에 비친 그 여학생은 보이지도 않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마치 켜져 있던 촛불이 거지 듯이 화면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30여 장의 사진을 처음부터 다시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스크린 속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빨간 가방을 멘 그녀는 새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집과 집 사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