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변에서 ‘외국에서 살면 힘들다더라’, ‘외롭다더라.’ 이런 말들을 듣지만, 실제로는 별로 구체적인 정보 없이 외국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내가 10년 전에 그랬다. 나는 아무 지인 없이 혼자서 외국 생활을 시작했기에 생활 정보, 지역 정보, 직업 정보 등 모든 생존 정보들을 일일이 찾아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일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타 문 화권에서 살게 될 때, 내면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 왜 그런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말이다.
그동안 한국을 떠나 살아오는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누군가 귀띔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동안 겪어야 했던 숱한 시행착오들을 되돌아보면, 마치 모진 바람을 다 견뎌내고 홀로 서 있는 누더기 깃발을 보는 것 같아서 내 스스로에게 미안해질 때가 많다.
어릴 때 어떠한 문화권 안에서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규범이나 행동방식 습득하는 것을 Enculturation 이라고 하고, 이미 어떤 문화가 학습된 사람이 자신이 자라온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권 안에서 살게 되면서 새로운 규범과 행동방식을 습득하는 것을 Acculturation 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문화 변용’이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문화인류학자들이 평하듯이 아주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문화충격이나 향수병, 정체성 혼란 같은 힘든 시기를 겪는다.
Whales In The Forest는 우리 문화와 타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에 살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 이해하기 힘든 우리와 영국인들의 차이,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겪는 과정에 대해서 담아 보려고 한다. 무엇이 어떻게 어려운지, 왜 그런지,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보고, 공감하고, 또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숲에 사는, 혹은 숲을 꿈꾸는 모든 고래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치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런던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는 모로칸 레스토랑 MOMO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울증과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우리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월: 어떤 계기가 있었던거야?
블루웨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멀쩡하게 잘 지냈었는데…. 영국에 온 지 3개월쯤 됐었을 때인가? 심하게 다운된 적이 있었어. 우울증 같은 게 왔었나 봐.
하버포퍼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고?
블루웨일: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또 좋아하는 게 뭔지 귀 기울이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 언어나 음식이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뭔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들이 내가 알던 거랑은 너무 다른데, 이런 상황들이 닥칠 때마다 계속 내 감정을 억누르기만 했던 거야. “아, 이건 달라서 그렇다. 받아들이자~” 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싫다, 아니다’ 라고 말해도 되는데 말을 안 했어. 남의 나라에 왔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그 문화에 맞춰야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하버포퍼스: 아! 나 무슨 말 인지 알겠다. 내가 딱 지금 그러고 있는데.
나월: 외국 생활 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특히 더 그래. 일단은 눈치껏 맞춰야 하니까. 근데 문제는 눈치껏 맞춰야 하는 일이나 상황들이 숫자로 셀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거야.
블루웨일: 맞아. 근데 게다가 난 그때 주변에 아직 친한 친구가 없어서 이런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나월: 그러면 더 힘들어. 나도 처음에 왔을 때 한국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 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 좋아하는 편인데 영국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다 보니까, 어느덧 왠지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아지는 것 같고…. 점점 성격이 변하더라. 사람들하고 만나서 어울리려면 일단은 즐거워야 하는데, 영국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정신적인 노력이 너무 많이 들고, 힘들어서 그런 것 같아. 한국에서는 사람들하고 온종일 놀아도 안 지쳤다면, 영국에서는 2~3시간만 같이 있고
얘기해도 벌써 지쳐서 혼자 쉬고 싶고 그랬어.
블루웨일: 어. 지치는 건 뭐 당연하고, 난 사람들이랑 펍에서 점심만 먹고 와도 기가 빨려서 (웃음). 그러다 보니 입맛도 떨어지고,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계속 운동만 하니까 살이 한 3kg 정도 빠졌었어. 그런데 분명 힘들고 우울하다고 느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뭐가 힘들었는지 확실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아. 그도 그럴 것이 따져보면 표면적으로는 잘 지내고 있었던 거였거든. 한국에서는 얘기만 들어도 부러워할 법한 생활을 하면서.
그런데 실은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내가 즐겨 먹던 음식도 없고, 내가 즐기던 일들도 없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이곳에는 없는 것들을 갈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또,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도 힘들었지. 다 원하던 대로 잘 되고 있는데, 왜 나는 바보같이 이런 기분을 느끼지 하면서….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모든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도 힘들었지. 내가 오자마자 Red nose day였는데, 난 도대체 이게 뭔지, 왜 하는 건지 아무 배경 지식이 없으니 일단 대화에 끼기도 힘들었어. 나는 누군가가 이런 것 하나하나 일일이 다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진공상태에 있는 거야.
이런 일들이 매일매일 수도 없이 일어나다 보니까, 나는 계속 배워야만 하는 입장에 있게 됐고, 또 그러다 보니 “이 사람들은 여기서 태어나고 산 사람들이니까 잘 알겠지, 이 사람들이 하는 게 다 맞겠지.” 생각하면서, 무조건 맞추기만 하면서 살게 되더라. 그렇게 3개월 지내니까 결국 우울증 비슷한 게 온 거 같아.
하버포퍼스: 갑자기 터진 거야?
블루웨일: 응. 그전에도 물론 힘들었겠지만, 괜찮은 척을 했던 거 같아. 그리고 내가 괜찮을 척을 하고 있는지를 나조차도 몰랐던 거야.
하버포퍼스: 갑자기 순간적으로 공허감 같은 게 드는… 뭐 그런 건가?
블루웨일: 응 응! (격한 동의)
하버포퍼스: 나도 사실 지금 그런 걸 느끼거든. 잘 지내고 잘 사는 거 같은데, 내 안에서는 뭔가 공허한 느낌. 왠지 공허하다는 말로도 뭔가 부족하고, 말로 잘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야. 특히 런던에서는 날씨 때문에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 순간들이 다가오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그냥 상대방이 하는 대로 맞추게 돼. 그러고 나서 오는 공허감 같은 거….
나월: 나도 그런 비슷한 시기를 겪을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엔 나도 그걸 바로 느끼지는 못했고, 그냥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게 왠지 나도 모르게 점점 꺼려지고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 나중에서야 조금이나마 자각하게 됐던 거 같아, 좀 많이 심해졌을 때.
그런데 설령 자각했다고 해도, 환경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 거 같아. 나는 그렇게 우울한 시간을 겪던 도중에 한국에 잠깐 들어가게 됐는데, 그 말을 참 많이 실감했어. ‘똥개도 제 구역에서는 50% 먹고 들어간다’는 말 (웃음).
하버포퍼스, 블루웨일 (동시에): “내 나와바리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
(다 같이 웃음)
하버포퍼스: 그거 경상도에서는 ‘나와바리’ 라고 해. 내 나와바리니까 어딜 가든 안다 이거지. (웃음)
(나월은 대전, 하버포퍼스는 거제도, 블루웨일는 부산 출신)
나월: 한국에 딱 갔는데, 그냥 내가 하는 모든 말이나 행동들이 너무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보일까, 저렇게 행동하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됐지.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나’ 라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느낌? 마음도 너무 편하고, 금방 행복해지더라.
그런데 여기서 살면 말 하나 행동 하나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사회의 준칙이 다르니까.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맞나?’ 하고 스스로 계속 의문을 던지는 거야.
하버포퍼스: 응. 의문이 항상 들어. 우리가 여기서 자라온 게 아니니까 맞는 건지 아닌지 항상 의문을 갖는 거 같아. “이런 행동이 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런 거. 그래서 난 같이 일하는 친구한테 종종 물어봐.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버릇없는 거 아니야?’ 하는 식으로. 결국엔 아주 좋은 사람인 척, 괜찮은 척, 밝은 척 이렇게 하다 보니까 결국 안으로는 공허감이 생기는 거 아닌가 싶어. 이게 나 자신이 맞나 이런 의심도 들고.
나월: 나도 요즘 ‘나는 누구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뭐지.’ 그런 질문들을 하고 있어.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 같아.
하버포퍼스: 그런 게 정체성 혼란인가? 이게 나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들어 내는 건가 싶고. 근데 이런 생각이나 감정들이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워. 난 기껏 이 모든 걸 ‘왠지 공허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 못 했잖아. 그러다가 아까 언니가 힘들다는 얘기 꺼냈을 때, 어떤 느낌인지 감이 확 왔어. 어찌 보면 난 사실 지금 대화 하는 도중에 깨달은 거 같기도 해. 지금까지는 그냥 뭔가 이상하고 어두운 느낌이 있었다고만 알았지 정확하게 꼭 집어서 설명을 못 했으니까. 그냥 가끔 자기 전에 왠지 눈물이 찡한 그런 게 있었어. ‘내가 원했던 대로 다 잘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서글프지….’
하면서.
나월: 너도 그렇구나….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그런데 블루웨일은 그때 힘든 감정을 지금은 다 극복 한 거야?
블루웨일: 응.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내가 그런 상황이라는 걸 주변에 이야기한 게 도움이 많이 된 거 같아. 모든 사람에게 구구절절 다 이야기 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얘기했지. 예를 들어서, 점심 먹으면서 “요즘 어때” 하고 물으면, 요즘 안 좋다고 솔직히 말했어. “왜?” 그러면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기분도 좀 다운되고 향수병도 좀 있는 거 같고, 좀 그러네. 너희 문화에 적응해가는 과정이겠지?” 하는 식으로 표현했지. 너무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조심해야 하긴 했어. 이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사는 사람 들이고 나는 외국인인데, 내가 ‘너희 문화 이런 거 맘에 안 들어, 이상해, 짜증 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황당할 테니까. 영국 음식만 먹다 보니까 물린다는 얘기 정도는 농담 섞어 하기도 했지.
어느 정도 내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무조건 잘 지내는 척, 괜찮은 척했을 때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그 친구들이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고 어떤 감정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살면서 어느 정도 힘든 점이 있겠구나 하고 이해는 하는 거지. 그리고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준다거나 사소한 배려를 해준다거나 하면, 작은 친절에도 엄청난 치유를 받았던 것 같아.
하버포퍼스: 그래. 마음이 되게 어려져 있으니까.
블루웨일: ‘아, 여기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고 느꼈어. 내가 너무 혼자 아등바등 하면서 “너희는 그대로 있어. 내가 너희한테 딱 맞춰볼게.”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이 친구들도 나를 배려해서 좀 더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거라는 걸 느꼈어. 배려의 크기가 고맙다기 보다, 그냥 나를 생각해준다는 사실 자체가 고마운 거 같아.
하버포퍼스: 그래. 누군가 옆에서 “괜찮다”고 말해줄 때 드는 그런 마음 있잖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별거 아닐 수도 있고, 그냥 티슈 하나 건넨 건데도, 내가 마음이 약해있거나 울고 있을 때는 엄청나잖아 그게. 여기서 살다 보니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정 같은 게 많이 그리워. 한국에서는 많이 해주는 거 같은데, 여기는 그런 게 별로 없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게 문화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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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고래 리서치 1.
“타향살이로 인한 우울증이나 향수병을 극복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페이스북 facebook.com/WhalesInTheForest 혹은 트위터 @ForestWhales에 답글을 남겨주시고, 문의사항이나 개인적인 사연을 공유하실 분들은 WhalesInTheForest@gmail.com 로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글을 읽어본 친구들 중에 여럿이 이런 말을 했다. ‘해결책’을 달라고. 이 글을 읽으며 무한히 공감하던 중, 끝에 뭔가 획기적인 대안이 나오기를 희망했었던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한 길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돕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 칼럼이기 때문에, 내친김에 해결책까지 제시해 줄 수 있다면 나도 참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것은 없다.
나는 이 ‘해결책’이라는 것이 마치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건강해질 수 있나요.” 이런 부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다 다르고, 변수는 무한하므로.
타지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나는 여전히 외롭고,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오로지 몇 년 외국 생활을 더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토종 영국인들 사이에서 사람 구실 할 만큼 영어만 배우는데도 보통 5년 정도가 걸린다. 그런데 의사소통만 잘 되면 다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5년을 견디고 나면, 1~2년을 살았을 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어떻게 하면 해결책에 가장 근접한 무언가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는 리서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왜 그런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등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것으로 통계를 낼 수 있다면, 그 결과로 조금은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제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 취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