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지선

벌써 세 번째 이사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로 시작한 영국생활이 이제 2년 남짓인데 짐이 왜 이렇게 늘어난 걸까. 친구에게 빌린 이민가방에다 제 몸보다 크게 퍼런 입을 벌린 이케아 쇼핑백에 잡동사니를 꾹꾹 눌러 담았는데도 아직 싸야 할 짐이 더 많이 남았다. 빠듯한 유학생활에 높은 영국의 물가 때문에 내가 동전 몇 개에 얼마나 궁상을 떨며 울컥울컥했었는데, 그 동안 뭘 이리도 많이 사모은거지.. 아무래도 택시를 불러야겠다, 머리 속으로 택시비에 1800원을 곱해보면서 100장이 넘게 쟁여놓은 마스크 팩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그러고 보니 사놓고 몇 번 입지도 않고 박아놓은 취향에도 맞지 않는 옷이 꽤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엔 그 옷을 넣으려고 샀던 중고 서랍장도 보인다. 서랍장 속에서 구겨진 옷을 다려줄 다리미도, 빳빳하게 다린 옷을 걸친 나를 확인시켜줄 거울도.

생각해보면 삶의 모든 움직임이 소비와 소유에 연결되어있는 것 같다. 해외생활이란 응당 절식(?) 금욕, 무소유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괜시리 서럽고 때때로 공허한 타향살이를 달래는 데는 소비만한 것이 없다. 슈퍼에 들러 언제 먹는 건지는 모르지만 병이 예쁜 소스를 사본다거나 싸구려 액세서리를 사는 일 혹은 영어공부를 핑계로 끝까지 읽지도 않을 럭셔리 라이프 스타일 잡지 따위를 사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았던 시간들. 문득 이삿짐을 가득 채운 싸구려 잡동사니들을 보고 있자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 내가 나중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여기서 이렇게 궁상맞게 살고 있나. 중이 염불 외듯 매일같이 중얼거리는 내 단골대사가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타향살이는 모든 것에서부터 한발 발을 빼게 만든다. 내일이라도 당장 비자가 없으면 쫓겨나는 외노자 신세, 남의 손에 내 운명을 맡기는 것만큼 초라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또 여기서 영원히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접점을 이루어 인생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만약 여기서 나이만 먹고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그 다음엔 나 뭐 먹고 살지,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당장 짐을 싸야 하나, 아니야 다들 영국에 오고싶어 안달인데 나는 그래도 잘하고 있는걸 꺼야……. 결론 없는 생각들이 거미줄처럼 끈적하게 이어져 나오며 스스로를 더욱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발을 푹 담그지 않으면 그 어떤 일이라도 계속 내 주변에서 겉돌기만 한다. 내가 한발을 빼고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살고 있으니 이곳에서의 내 삶도 이케아 쇼핑백에 담긴 싸구려 잡동사니들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독한 영국날씨에도 해는 비추듯이 언젠가는 이 쓸쓸한 시기도 끝날 것이다. 해가 비치면 나는 또 어딘가를 향해 걷고 축축하게 젖은 외투도 마르겠지 어제의 날씨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 이번에는 빼놓은 한발 슬쩍 담그는 의미로 값나가고 근사한 화장대를 한번 들여놔 볼까.